명퇴자(名退者)와 그 마누라의 푸념 - 이 종 택

명퇴자(名退者)와 그 마누라의 푸념


이 종 택


"명퇴 좋아하네. 멀쩡한 사람들 쫓아내면서 명예스런 퇴직이라고?"
투덜대며 들어오는 S여사는 인력공사(人力共社) 유리창문을 탁 닫고 힘없이 주저 앉는다. S여사
는 시집올 때만 해도 괜찮은 여자였다. S여사가 월급쟁이 마누라가 된지는 오래 전 일이다. 그
는 남편의 첫 월급을 받아본 순간 이것으로 언제 아파트를 장만하고 자가용을 타보기까지는 앞날
이 너무 요원했었다. 그래서 그는 다짐했다. 젊었을 때 고생은 사서라도 한다는데 고무신 두 켤
레 놓여있을 때 돈을 벌어야겠다면서 결혼 직후부터 맞벌이 부부로 나섰다. 조그마한 양품점에서
부터 미용 재료상, 학원강사, 백화점 점원까지 여러 가지 직종을 옮겨 다니면서 뛰어 봤지만 모
두 손해만 보고 끝났다. 그래서 차라리 이럴 바엔 부족하지만 남편의 월급만으로 알뜰하게 살림
을 꾸려 나가는 게 현명하다 싶어 재작년부터 전업주부로 변신했다.

이렇게 마음을 바꾸고 나니 매달 25일이면 꼬박꼬박 월급을 갖다주는 남편이 든든하고 믿음직스
러웠다. 사업하는 남편을 둔 친구들을 보면 돈을 펑펑 쓰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부도 어쩌고 하
면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 피 말리는 고통을 지켜 볼 때면, 내가 남편 하나는 잘 골랐지 했
었다.

그러던 어느 날, 갑자기 날벼락이 떨어졌다. 신문이나 드라마에서만 보았던 '명퇴바람'이 남편
회사에도 불어닥친 것이다. 날마다 7시만 되면 '땡'하고 들어오던 사람이 20분이 지나서야 전화
가 걸려왔다.
"나 기다리지 마소." 힘없는 목소리다. "왜? 몇 시에 올 건데?" "몰ㅡ라." " 느닷없이 무슨 소리
야?" "오늘 김 차장 보따리 쌌다. 명퇴 국 먹고 떠났어." "명퇴 국?"
그 순간 S여사는 명치끝이 찡하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. 아까 골목길에서 보았던 포장마차와
버스 터미널 풀 빵 아줌마의 뒷모습이 퍼뜩 스치고 지나갔다.
"어째서 그래, 응? 무슨 일이야. 자기 회사는 괜찮다고 했잖아?" "그게 아니었나봐, 기습당했
어, 아이고 이 나쁜 놈들, 벌써 김차장 책상까지 빼버렸다니까, 자기 각오 단단히 하소.나는 절
대로 못나간다. 여기서 먹고 자고 해서라도 내 자리 꼬-옥 지킬란다."

언제는 자기가 차세대 주자며, 상무님의 오른팔이며, 팀 내의 아이디어 뱅크에 떠오르는 전설이
라고 자랑하더니만. 어제 밤만 해도 자기에게 여기저기서 스카웃 제의가 들어오니까 상무님이 긴
장한다는 둥, 자기 없으면 회사는 셔터를 내려야 한다고 큰소리 칠 때는 언제고 지금은 그 잘난
책상하나 지키자고 저렇게 목숨을 거나 싶었다.
"주변머리 없는 인간, 그래도 회사에선 인정받나 싶어 든든했는데" 실망이 너무도 컸다.

그러나 막상 남편이 직장에서 떨려 나왔을 때를 생각해보니 너무도 막막했다. 할 수 있는 일이라
곤 아무것도 없었다. 그동안 이것저것 맞벌이한답시고 있는 돈은 다 없애 버리지 않았던가. 이제
는 물려받을 재산도, 벌어놓은 돈도 없다. 누구처럼 처가가 돈이 있는 것도 아니고….노동이라
도 해서 벌어먹고 살려면 건강이라도 좋아야 할텐데, 자신의 건강을 생각해 보았다. 그러나 S여
사는 위장병에, 축농증에, 치질에, 꽃가루 알르레기 성 비염까지, 의료보험 카드를 바꿀 때가 되
면 모서리가 다 닳아질 지경이었다. 성격은? 7남매 막내라서 그런지 공주병에다 이기적이고 고집
은 오죽 센가. 그 성질에 남 앞에 아부는 절대 못해서 하는 일마다 실패했었다.

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이의 퇴직은 곧 한가정의 불행이자 재난이었다. 급한 성질 꾹꾹 눌러 참
고 포장마차를 끌고 나가거나 모래등짐이라도 져야 할 판이었다. 그래도 어느새 세월은 흘러 토
끼 같은 새끼들은 둘, 이제 와서 처녀 때로 되 물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. 자기와 살다보면 드레
스 입고 파티 장에 나갈 수 있는 날도 있을 거라며, 봄이면 드넓은 그린필드에서 샷을 날리고,
여름이면 은빛 파도치는 해변으로, 가을이면 울긋불긋 단풍 터널 속을, 겨울이면 눈 덮인 스키장
에서 머플러 휘날리며 놀다가 벽난로에 장작불 따닥 따닥 피워가며 인생을 즐길 날이 있을 거라
더니 벽난로에 장작은커녕 장작불 때서 군고구마 굽게 생겼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.

밤 10시가 넘어 기진맥진해서 들어온 남편은 힘없이 S여사의 품에 쓰러지며 "자기야, 나는 자기
만 믿는다." "뭐라고? 나만 믿는다고?"
자기만 믿으라고 큰소리 치며, 자기만 믿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고 한 것이 엊그제다. 지난번
에 3년 간이나 부은 적금을 해약해 갈 때만 해도 그랬다. S여사는 기왕에 주식을 살 거라면 H건
설이나 S전자를 샀으면 했다. 그러나 그때도 "내가 누구야, 모르면 가만이나 있어." 라고 했다.
그러더니 하필이면 금방 망해버린 D엔지니어링을 사 가지고 떡은커녕 본전마저 휴지조각이 되어
버렸지 않았던가.

그래 놓고서 이제 발등에 불이 떨어지니까 나만 믿는다고? 어림없는 소리, 당장 나가서 잃어버
린 돈 찾아오라고 등 떠밀어 내쫓고 싶었지만 수양한셈 치고 침 한번 꿀꺽 삼키고 마음을 돌렸
다.
"그래 자기야, 나만 믿소."
그리고 등을 두다독여 재웠다. 그날따라 다리도 못 뻗고 옆으로 잔뜩 오그린 채 새우잠을 자는
모습이 측은하고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. 그 날밤 S여사는 걱정이 되어 뜬눈으로 날을 샜으면서
도 아침 일찍 밥을 챙겨 주고 서둘러 출근을 시켰다. 그런데 남편이 출근하자마자 사무실 분위기
가 웅성웅성, 이유인즉 조 부장에게 친전(親展)이 날아 왔다는 것이다. 친전이란 사장이 직접 본
인에게 전달하는 편지로 그 속에는 사퇴 권고서가 들어있는 사형 통고서다. 조 부장은 얼굴이 불
그락 푸르락 하다가 편지봉투를 찢어보더니 오만상을 찌푸리고 아무 말도 없이 휙 밖으로 나가
버렸다.

그 뒤로 보름동안은 잠잠했었다. 그런데 오늘 강 대리가 또'친전'을 받았다.
"저는 벌써 각오하고 있었습니다. 이제 사업이나 슬슬 해 보렵니다. 마누라가 미장원 하면서 모
아놓은 돈이 좀 있답니다."
그 날부터 S여사에게는 시련이 닥쳐왔다. 남편은 눈만 마주치면 한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. 바
늘방석이 따로 없었다. 분위기를 좀 역전시켜 보려고,
"그전에 그랬잖아, 자기 말대로 괜히 여자가 몇 푼 벌어보려고 나서면 집안 꼴만 어수선해지고
이 불경기에 쪽박 차기 십상이라고, 또 남편 기만 죽이고. 그렇지?"
"남편 기 안 죽더라. 강 대리 봐, 기고만장하던데 뭐. 보따리 싸 가지고 집에 가자마자 마누라
가 통장 두 개 척 내 놓으면서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그러더래. 되는 집안이지. 영업부
임 과장 알지? 마누라가 보험회사 다니잖아? 1년 좀 넘었는데 보수가 임 과장 보다 훨씬 많다지
아마, 그 자식은 요즘 배짱이야. 오늘 전무 실에 고개 바짝 들고 들어 가더라니까. 뭘 믿고 그런
지 원"

"당신은 그게 그렇게 부러워?"
"부럽긴 나 그런 놈 아니야, 마누라 덕보고 살 놈으로 보여? 나 절대 그런 놈 아니야!"
"그래 자기야, 돈 한푼 안 벌어도 살림 잘 하고 어린애 잘 키우고 건강하면 그게 버는 거야, 아
직 젊은데 뭐."
그러나 남편은 S여사의 말은 듣는지 마는 지 신문만 신경질적으로 뒤적거리더니,
"여기 좀 봐, 좋은 것 나왔네, ㅇㅇ회관에서 실비로 도배기술을 가르쳐 준다네. 어이구, 거기다
가 취업알선까지. 부업으로 하면 짭짤하겠다. 이런! 남자라도 된다면 내가 가겠고만 주부 대상이
라네. 의욕있고 건강한 주부들만 모신다네."

치사하고 더러워서 그 날 바로 ㅇㅇ회관으로 찾아갔다. 그러나 영세민 우선이라며 자격미달로 퇴
짜를 맞고 걸어오는 길은 발걸음이 천근보다 더 무거웠다. 그래도 어느새 월급날이 돌아왔다. 봉
투를 내밀면서 하는 말.
"내 피와 땀이야, 한푼 쓸 때마다 내 오간장 녹은 것인 줄 알고 아껴 쓰소"
S여사도 속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. 그런데 웬 월급봉투가 지난달보다 두툼했다. 내역서를 보니
야간수당이 더 보태진 것이다. 깜짝 놀라 "자기야 이러면 안되지. 야근이야 목숨 연명 책으로 서
비스 한 거야, 수당을 받아오면 어떻게 해. 이걸 사장이 알게되면 감원 대상 0 순위야, 0순위."

그 뒤로 명퇴의 위기 앞에선 남편은 간, 쓸개, 다 빼놓고 얼굴에 철판을 깔기로 마음먹었다. 부
장이 결재 판으로 뒤통수를 때려도 눈 한번 흘기지 않고, "감사합니다. 더욱 분발하겠습니다" 했
다. 어쩌다 영광스럽게도 전무와 식사라도 함께 할 때면 옆에 앉아서 젓가락을 숟가락 옆에 놓아
주고 물수건은 오른 쪽에 생선토막은 밥그릇 옆에 당겨드리고 고기는 타지 않게 잘 뒤적여 앞에
다 수북히 쌓아드렸다.

그러나 결정적인 아부의 극치는 또 있었다. 집에 100% 미국산 행주가 있었는데 남편이 며칠 전부
터 들었다 놓았다 눈독을 들이는 것 같아서 연유를 물어보니 전무가 난(蘭)을 애지중지 하는 데
잎이라도 닦아드리는 게 도리 아니겠느냐고 하는 것이 아닌가. 집안에 유일한 녹색식물인 행운
목 수반에 담배꽁초를 끄는 사람이 이 정도 되었으니 아부도 이쯤 되면 질환수준(疾患水準)이
라, 차라리 내일이라도 당장 그만 두게 하고 내가 생강이나 마늘을 캐는 게 낫겠다 싶어 여기 인
력 공사에 나와 열심히 일자리를 찾는 중이란다.

미장이나 타일은 저 트럭으로, 학생들은 저 차 타고, 생강은 봉고차, 마늘아줌마 이리 오세요.
부릉부릉 오늘도 인력공사 아침 마당에는 생기 가득 찬 일꾼들이 삶의 현장으로 새벽을 가르며
달려가고 있었다. (2003. 7. 4.)
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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by 강철왕 | 2007/10/20 15:21 | 월마트 | 트랙백 | 덧글(0)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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